[작성자:] saramnara

  • 결핍은 채워야 할 빈자리가 아니라, 미래가 들어올 자리다

    서론 | 부족했던 것은 정말 불행이었을까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없는 것을 먼저 바라본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던 환경, 충분히 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사랑, 배우지 못한 것, 이루지 못한 꿈, 사람에게 받은 상처까지. 우리는 이런 것들을 ‘결핍’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결핍은 대개 빨리 없애야 할 문제로 여겨진다. 돈이 부족하면 돈을 채우고, 지식이 부족하면 배우고, 인정받지 못하면 더 인정받으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살아갈수록 조금 이상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를 채우면 또 다른 부족함이 보인다.


    원하던 것을 얻었는데도 마음 한편은 여전히 허전하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어볼 필요가 있다.

    결핍은 정말 채우기만 하면 없어지는 것일까?

    어쩌면 결핍은 나를 괴롭히기 위해 존재하는 빈자리가 아니라, 내가 아직 만나지 못한 가능성이 들어올 자리인지도 모른다.

    1. 결핍을 없애려 할수록 결핍은 더 커질 수 있다

    우리는 부족함을 느끼면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과 비교한다.

    “저 사람은 있는데 나는 왜 없을까?”
    “나는 왜 이런 환경에서 시작했을까?”
    “조금만 더 가졌더라면 내 인생도 달라졌을 텐데.”

    그러나 비교는 결핍을 해결하기보다 확대할 때가 많다.

    나에게 없는 것을 기준으로 나를 바라보기 시작하면 이미 가지고 있는 능력과 경험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결핍에 대한 첫 번째 역설이 생긴다.

    결핍은 부족해서 커지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것만 바라볼 때 더 커질 수 있다.

    반대로 부족함을 질문으로 바꾸면 상황은 달라진다.

    “왜 나는 이것이 어려울까?”

    “이 경험을 통해 내가 배운 것은 무엇일까?”

    “앞으로 같은 문제가 왔을 때 나는 어떻게 다르게 행동할 수 있을까?”

    이 순간 결핍은 더 이상 나를 평가하는 기준이 아니다.


    나를 연구하는 자료가 된다.

    인생에서 경험한 실패와 상처도 마찬가지다. 지나간 일을 없앨 수는 없지만, 그 경험에서 무엇을 발견하느냐에 따라 과거의 의미는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성장하는 사람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배움의 재료로 바꿀 줄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2. 내가 지나온 시간은 실패의 기록이 아니라 성장의 자료다

    우리는 성공한 경험은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힘들었던 경험은 숨기려 한다.

    그러나 사람을 깊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성공만은 아니다.

    사람 때문에 힘들어 본 사람은 관계를 연구하게 되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어본 사람은 돈의 가치를 다르게 생각하게 된다. 실패해 본 사람은 선택을 신중하게 배우고, 외로움을 경험한 사람은 누군가의 외로움을 알아볼 가능성이 커진다.

    물론 고통 그 자체가 사람을 자동으로 성장시키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고통 이후에 무엇을 배우느냐이다.

    똑같이 어려운 일을 경험해도 한 사람은 원망에 머물 수 있고, 다른 사람은 그 경험을 관찰하고 기록하며 자신의 삶을 바꾸는 자료로 사용할 수 있다.

    여기에서 삶의 방향이 갈라진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을까?”에만 머물면 과거가 현재를 붙잡는다.

    그러나

    “이 경험을 가지고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라고 질문하기 시작하면 과거는 미래의 재료가 된다.

    그래서 인생을 잘 살아간다는 것은 좋은 일만 많이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경험을 버리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3. 미래는 결핍을 지우는 데서가 아니라 사용하는 데서 시작된다

    지금은 자신의 경험을 기록하기 좋은 시대다.

    예전에는 마음속 생각을 일기장에 적어두는 것으로 끝났다면, 이제는 기록한 내용을 다시 읽고 정리하고 분석할 수 있는 여러 도구가 있다. AI도 그중 하나다.

    AI에게 인생의 답을 맡기자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내가 경험하고, 내가 생각하고, 내가 선택하되 AI를 거울처럼 활용하는 것이다.

    오늘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를 기록해볼 수 있다.


    반복해서 부딪히는 관계를 정리해볼 수도 있다.


    십 년 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일을 지금의 시선으로 다시 바라볼 수도 있다.

    그 기록들이 쌓이면 흩어져 있던 사건 사이에서 하나의 흐름이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항상 같은 선택을 했구나.”

    “그때의 부족함 때문에 오히려 이것을 배우게 되었구나.”

    “내가 약점이라고 생각했던 경험이 지금 하는 일과 연결되어 있구나.”

    이것이 기록의 힘이다.

    기록은 과거를 보관하는 일이 아니라 과거에서 미래에 필요한 지혜를 꺼내는 일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결핍의 의미도 달라진다.

    없애야 할 흠이었던 결핍이
    연구해야 할 자료가 되고,

    부끄러웠던 과거가
    누군가에게 전할 수 있는 경험이 되며,

    실패라고 생각했던 시간이
    앞으로의 방향을 알려주는 지도가 될 수 있다.

    결론 | 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성장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모든 것이 갖추어지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채워진 사람에게는 더 이상 움직여야 할 이유도, 새롭게 배워야 할 이유도 없을지 모른다.

    그래서 결핍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고 싶다.

    결핍은 인생에서 빠져 있는 조각이 아니라, 앞으로 내가 만들어갈 부분이다.

    부족함이 있다는 것은 아직 성장할 공간이 있다는 뜻이고, 모르는 것이 있다는 것은 배울 것이 남아 있다는 뜻이며,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다는 것은 내가 앞으로 발견할 답이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미래를 바라보는 태도도 달라진다.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되었을까?”가 아니라
    “나는 여기에서 무엇을 더 만들어갈 수 있을까?”

    라고 묻게 된다.

    긍정적인 미래란 아무 어려움도 없는 미래가 아니다.

    어려움이 와도 그것을 해석하고 배우며 다음 선택을 바꿀 수 있는 내가 되어가는 미래다.

    그러므로 지금 나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해서 내 인생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오늘의 나는 완성품이 아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도, 부족했던 환경도, 사람에게 받은 상처도, 내가 저질렀던 실수도 잘 연구하고 정리한다면 앞으로 살아갈 나를 만드는 재료가 될 수 있다.

    어쩌면 우리가 평생 채워야 하는 것은 결핍 그 자체가 아니라 결핍을 바라보는 나의 지혜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이제 부족함을 조금 다르게 바라보려 한다.

    없애야 할 과거가 아니라
    배워야 할 자료로,

    나를 작게 만드는 약점이 아니라
    나를 움직이게 하는 질문으로,

    그리고 아직 채워지지 않은 빈자리가 아니라
    새로운 미래가 들어올 자리로.

  • 추석, 이제는 빌기보다 감사할 때다

    지식시대의 명절, 축원의 방향도 달라져야 한다

    서론 | 우리는 추석에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추석이 다가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가족의 건강과 평안, 자녀의 앞날과 하는 일의 번창을 기원한다. 오랫동안 이어져 온 익숙한 명절의 모습이다.

    그런데 한 번쯤 다른 질문을 해볼 필요가 있다.

    지식이 부족했던 시대의 축원과 지식이 넘쳐나는 시대의 축원이 같아야 할까?

    과거 농경사회에서 인간의 삶은 자연에 크게 의존했다. 비가 적당히 내려야 농사를 지을 수 있었고, 태풍이나 가뭄이 오면 한 해의 생계가 흔들렸다. 질병이 생겨도 원인을 알기 어려웠고 인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일도 많지 않았다.

    그런 시대에 하늘과 자연, 조상에게 풍년과 건강을 비는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절실한 삶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간다.

    교육을 받고, 세계의 정보를 실시간으로 접하며, 과학과 기술을 사용한다. 어려움이 생기면 원인을 찾고 해결 방법을 공부할 수도 있다.

    사람이 가진 지식과 능력이 커졌다면 명절을 대하는 마음도 함께 성장해야 하지 않을까.

    1. 빌었던 시대에서 감사할 수 있는 시대로

    과거의 축원에는 간절한 바람이 많았다.

    “올해도 풍년이 들게 해주십시오.”

    “우리 가족이 무사하게 해주십시오.”

    “자식이 잘되게 해주십시오.”

    그것은 부족했던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마음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선대가 경험하지 못했던 많은 것을 가지고 살아간다. 학교에서 배우고, 병원에서 치료받고, 인터넷을 통해 세계의 지식을 접한다. 필요한 것을 직접 찾고 배우며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범위도 크게 넓어졌다.

    그렇다면 이제 축원의 첫마디도 조금 달라질 수 있다.

    “무엇을 더 주십시오”가 아니라
    “이만큼 받을 수 있도록 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부모의 수고가 있었고 그 부모의 수고가 있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수많은 선대의 삶이 있다. 한 세대가 다음 세대를 키우고, 그다음 세대가 다시 지식과 경험을 보태면서 오늘의 사회가 만들어졌다.

    그래서 추석의 감사는 단순히 음식이 풍성해서 드리는 감사가 아니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이어져 온 수많은 삶과 희생을 기억하는 감사가 될 수 있다.

    2. 감사는 과거를 기억하고, 축원은 미래를 향한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볼 수 있다.

    감사만 하고 끝난다면 우리의 시선은 여전히 과거에 머문다.

    조상과 부모가 우리에게 삶의 기반을 물려주었다면, 이제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지식시대의 축원은 세 단계로 달라질 수 있다.

    “도와주십시오.”

    에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다시

    “이제 제가 받은 것을 바르게 사용하겠습니다.”

    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 마지막 한 문장이 중요하다.

    많이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아는 것이 많아지는 것이 아니다. 지식이 많아질수록 그 지식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책임도 커진다.

    나에게 주어진 능력을 가족만을 위해 사용할 것인지, 주변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게 할 것인지, 더 나아가 사회를 조금이라도 이롭게 하는 데 사용할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이렇게 바라보면 홍익인간이라는 오래된 말도 오늘의 언어로 다시 읽을 수 있다.

    거창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배우고 성장하여 갖춘 것을 나만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사람과 사회에 이롭게 사용하는 사람.

    그것이 지식시대에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홍익의 한 모습일 것이다.

    3. 소원을 비는 명절에서 삶의 방향을 세우는 명절로

    그렇다면 이번 추석에는 무엇을 하면 좋을까.

    제사상을 크게 바꾸거나 오래된 전통을 모두 버릴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형식보다 그 안에 담긴 마음의 방향이다.

    가족이 함께 모였을 때 이런 질문을 한 번 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올해 무엇을 받았는가?
    누구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는가?
    나는 앞으로 무엇을 나누며 살아갈 것인가?

    부모에게 감사할 일이 있다면 표현하고, 가족에게 고마웠던 일이 있다면 말하고, 만나지 못한 사람에게도 짧은 안부를 전할 수 있다.

    그리고 조상을 생각할 때에도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만 찾기보다,

    “여기까지 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가 잘 살아가겠습니다.”

    라고 마음을 가져보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지식시대에 어울리는 새로운 축원일 수 있다.

    축원은 반드시 무엇을 달라고 청하는 행위일 필요가 없다.

    내가 어떻게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는 것도 축원이다.

    결론 | 성장한 사람의 감사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오랫동안 조상을 잘 모시는 것을 효라고 배워왔다.

    그 정신은 소중하다.

    그러나 시대가 달라졌다면 효의 모습도 조금 더 넓어질 수 있다.

    부모에게 받은 것을 바르게 사용하고, 내가 배운 지식으로 사람에게 도움이 되며, 다음 세대가 조금 더 나은 환경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의 몫을 하는 것.

    그것 역시 오늘날의 효가 아닐까.

    그래서 이번 추석에는 복을 비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보았으면 한다.

    빌지 않는다고 조상을 잊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감사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하는 것이 조상을 더 깊이 기억하는 방법일 수 있다.

    과거의 명절이 부족한 것을 채워달라고 기원하는 시간이었다면, 지식시대의 명절은 이미 받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발견하는 시간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감사가 삶으로 이어질 때 축원의 방향도 달라진다.

    “잘되게 해주십시오”에서
    “잘 살아가겠습니다”로.

    이번 추석에는 우리가 무엇을 더 받을 것인가보다, 이미 받은 것을 어떻게 세상에 돌려줄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어떨까.

    그 작은 변화에서 빌기의 명절은 감사의 명절로,
    그리고 감사의 명절은 홍익의 삶을 다짐하는 명절로 한 걸음 성장할 수 있다.

  • 부모 자식 인연의 끝은 어디까지인지

    부모를 잘 모시는 것에서 부모를 넘어서는 삶으로

    서론 | 지식사회에서도 효는 옛날과 같아야 할까

    우리는 오랫동안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은혜를 주고 갚는 관계’로 배워왔다. 부모는 자식을 낳아 키우고 희생하며, 자식은 성장한 뒤 부모를 공경하고 돌본다. 이러한 효의 정신은 오랫동안 우리 사회를 지탱해온 중요한 가치였다.

    그러나 사회는 크게 달라졌다. 오늘날 자녀 세대는 부모 세대보다 더 많은 교육을 받고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빠르게 접하기도 한다. 특히 디지털과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지식이 만들어지고 전달되는 속도는 과거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렇다면 지식사회에서도 효는 부모의 말씀을 잘 따르고 부모를 잘 모시는 것만을 의미해야 할까?

    어쩌면 오늘날의 효는 부모에게 받은 것을 다시 부모에게만 돌려주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더 크게 성장시켜 세상에 돌려주는 것까지 포함해야 할지도 모른다.

    1. 부모는 답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출발점을 주는 사람이다

    과거에는 나이가 곧 경험이었고 경험은 중요한 지식이었다. 그래서 부모의 말을 따르는 것이 자녀에게 안전한 삶의 방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지식사회에서는 부모가 자녀에게 모든 답을 가르쳐줄 수 없다.

    부모가 살아온 삶을 하나의 ‘자료’라고 생각해보자. 부모가 잘한 것도 자료이고 실패한 것도 자료다. 참고 견딘 일도, 해결하지 못한 갈등과 아픔도 다음 세대가 들여다볼 귀중한 삶의 자료가 된다.

    그렇다면 자녀의 역할은 부모의 삶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삶에서 배우고 그다음 답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의 역설이 있다.

    좋은 자식은 부모를 그대로 닮은 자식이 아니라, 부모에게서 출발하여 부모를 넘어설 수 있는 자식일지도 모른다.

    부모를 넘어선다는 것은 부모를 무시하거나 부정한다는 뜻이 아니다. 부모가 만들어준 토대 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다. 자녀가 더 배우고 더 넓게 생각하여 이전 세대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해결한다면, 부모의 삶과 희생 역시 자녀를 통해 더 큰 의미를 갖게 된다.

    2. 효는 ‘얼마나 해드렸는가’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로

    효를 이야기하면 부모에게 자주 연락하고, 필요한 것을 해드리고, 아프면 병원에 모시고 가며 노년을 돌보는 일을 먼저 떠올린다. 이러한 돌봄은 당연히 중요하다.

    그러나 효를 돌봄만으로 정의하면 질문이 생긴다.

    부모 곁에서 자신의 삶 대부분을 희생한 사람만 효자이고, 자신의 공부와 사회적 역할을 위해 부모 곁을 떠난 사람은 불효자일까?

    이제는 “부모에게 무엇을 해드렸는가?”와 함께 “부모가 나를 키운 결과 나는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를 물어야 한다.

    부모는 자녀가 평생 자신의 곁에 머물도록 키운 것이 아니다. 스스로 살아갈 힘을 갖고 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하는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자녀의 성장은 개인적인 성공만이 아니다. 부모가 들인 시간과 노력, 희생이 사회적 가치로 바뀌는 과정이기도 하다.

    한 사람에게 받은 도움을 열 사람에게 나누고, 자신이 배운 것을 다음 세대에 전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사회의 문제 하나를 해결한다면 그것 역시 받은 은혜를 갚는 방법이다.

    그래서 지식사회의 효는 ‘보답의 효’에서 ‘성장의 효’로 확장될 필요가 있다.

    부모를 잘 모시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부모가 키운 것이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 그것도 오늘날 우리가 생각해볼 새로운 효의 모습이다.

    3. 부모와 자식의 인연은 서로 붙잡기 위해 있는 것일까

    부모와 자식은 매우 강한 인연이다. 그러나 그 강함 때문에 사랑과 집착을 혼동하기도 한다.

    부모는 사랑하기 때문에 자녀의 삶에 계속 개입하고, 자녀는 효도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자신의 길을 선택하면서도 죄책감을 느낀다.

    하지만 관계의 목적이 서로를 붙잡는 데 있다면 이상한 모순이 생긴다. 자녀는 잘 성장할수록 독립해야 하는데, 효를 강조할수록 다시 부모에게 묶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부모는 자녀를 잘 붙잡는 사람이 아니라 잘 보내줄 수 있는 사람이고, 좋은 자녀는 부모에게 계속 의존하는 사람이 아니라 부모에게 받은 힘으로 세상에 나아가는 사람일 수 있다.

    인연을 소유가 아니라 성장을 위한 관계로 바라보면 부모와 자식의 역할도 달라진다.

    처음에는 부모가 자녀에게 세상을 가르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자녀가 부모에게 새로운 시대를 설명해줄 수도 있다. 부모는 삶의 경험을 전하고 자녀는 새로운 지식과 시대의 변화를 나눈다. 나이가 영원한 위아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가진 것을 나누며 함께 성장하는 관계가 되는 것이다.

    결론 | 효의 끝은 부모가 아니라 사회일지도 모른다

    부모와 자식의 인연은 어디까지일까.

    이 질문을 ‘언제까지 부모를 책임져야 하는가’라고만 생각하면 답을 찾기 어렵다.

    부모가 자녀에게 준 것은 밥과 집과 교육비만이 아니다. 한 인간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의 시간과 경험을 내어주며 삶의 토대를 만들어준 것이다.

    그렇다면 자녀가 그것을 가장 크게 갚는 방법은 부모에게 받은 것을 부모에게만 되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성장시켜 더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일 수 있다.

    부모 역시 나이가 들었다고 역할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살아온 경험과 시행착오를 정리하고 연구하여 다음 세대가 같은 문제를 반복하지 않도록 지혜를 남길 수 있다.

    그래서 효를 이렇게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효의 시작이라면, 부모에게 받은 것을 성장시켜 세상에 돌려주는 것은 효의 확장이다.

    부모는 자식을 세상으로 보내고, 자식은 부모에게 받은 힘을 다시 사회로 보낸다.

    어쩌면 부모와 자식의 인연은 서로에게 되돌아오는 작은 원이 아니라, 가족에서 시작하여 사회로 점점 넓어지는 원(擴張: 넓힐 확장)인지도 모른다.

  • 노인은 많아졌는데, 왜 어른은 사라졌을까

    지식사회가 놓쳐버린 ‘어른의 역할’을 다시 생각하다

    서론|우리는 정말 어른이 많은 사회에 살고 있을까

    우리 사회는 빠르게 고령사회가 되었다. 거리에서도, 직장에서도, 지역사회에서도 나이 든 사람을 쉽게 만난다. 그런데 이상한 질문 하나가 남는다.

    노인은 많아졌는데, 우리는 왜 자꾸 “어른이 없다”고 말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우리가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겨온 생각의 오류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나이를 먹으면 자연스럽게 어른이 된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세월은 사람에게 나이를 더해줄 수는 있어도, 지혜까지 자동으로 더해주지는 않는다.

    대한민국은 교육 수준이 높고 정보와 지식의 축적이 매우 빠르게 이루어진 사회다. 학교교육을 받은 사람이 많고, 다양한 분야의 경험을 가진 사람도 많다. 인터넷과 디지털 환경을 통해 평생 새로운 정보를 접하는 사람도 늘었다.

    그런데 지식이 많은 사회와 어른이 많은 사회는 같은 말이 아니다.

    오히려 지식이 많아질수록 더 어려운 과제가 시작된다.

    배운 것을 어디에 사용할 것인가.
    경험한 것을 누구에게 돌려줄 것인가.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다음 세대가 활용할 수 있는 지혜로 바꿀 수 있는가.

    어쩌면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제는 노인의 증가가 아니라 지식을 지혜로 전환하는 어른의 부재인지도 모른다.

    본론 1|어른은 나이의 결과가 아니라 ‘연구의 결과’다

    우리는 흔히 오랜 경험을 가진 사람에게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경험이 많다는 것과 경험에서 답을 얻었다는 것은 다르다.

    같은 일을 30년 경험했더라도 그 경험을 돌아보지 않으면 단지 시간이 쌓인 것일 수 있다. 반대로 자신의 실패와 갈등, 선택과 관계를 끊임없이 돌아본 사람에게 경험은 하나의 자료가 된다.

    여기서 어른에 대한 정의를 조금 바꾸어볼 필요가 있다.

    어른은 오래 산 사람이 아니라, 오래 살아온 삶을 연구한 사람이다.

    자녀와 갈등했다면 “요즘 아이들은 왜 저럴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몰랐는지를 살펴보는 사람.

    직장생활에서 수많은 갈등을 겪었다면 후배에게 “나 때는 말이야”라고 말하기보다 그 경험에서 무엇을 배우면 같은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는지 정리하는 사람.

    사업에 실패했다면 실패를 숨기는 대신 다음 사람이 같은 길에서 넘어지지 않도록 경험의 원인을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

    그때 한 사람의 인생은 개인의 과거에서 사회의 자산으로 바뀐다.

    그래서 어른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권위보다 연구일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수록 말을 많이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관찰해야 하고, 가르치려고 하기보다 먼저 삶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어른은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계속 배우기 때문에 가르쳐줄 것이 생긴 사람이다.

    본론 2|후배가 말을 듣지 않는 것이 아니라, 들을 만한 답을 기다리는 것은 아닐까

    기성세대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어른 말을 듣지 않는다.”

    하지만 질문을 뒤집어보면 전혀 다른 장면이 보인다.

    젊은 세대가 어른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 사회가 그들에게 들려줄 새로운 답을 충분히 만들어내지 못한 것일까.

    과거의 경험은 중요하다. 그러나 사회 환경이 달라지면 과거의 정답이 오늘의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

    취업의 방식이 달라졌고, 결혼과 가족에 대한 생각도 변했다. 직업의 수명은 짧아지고 인공지능과 디지털 기술은 인간의 역할 자체를 다시 묻고 있다.

    이런 시대에 후배들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때는 이렇게 했다”는 정답지가 아니다.

    “나는 이런 일을 겪어보니 이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너희 시대에는 무엇이 달라졌는지 함께 살펴보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어른의 역할은 후배의 삶을 대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후배가 자기 시대의 답을 찾을 수 있도록 방향을 밝혀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사회의 어른은 ‘사회적 부모’와도 같다.

    가정의 부모가 아이의 모든 문제를 대신 해결해주는 사람이 아니듯, 사회의 어른도 젊은 세대를 통제하는 사람이 아니다. 앞서 살아본 경험을 연구하고 정리하여 다음 사람이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다.

    그런 어른이 많아질수록 세대 차이는 갈등의 원인이 아니라 지혜가 이동하는 통로가 된다.

    본론 3|대한민국에 필요한 것은 노인 대책만이 아니라 ‘어른이 되는 공부’다

    고령사회가 되면서 우리는 노후 준비를 많이 이야기한다.

    연금은 얼마나 필요한지, 건강을 어떻게 관리할지, 은퇴 후 어디에서 살 것인지가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물론 모두 필요하다.

    그러나 한 가지 질문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나는 나이가 들어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노후를 경제 문제로만 바라보면 사람은 일을 그만두는 순간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잃기 쉽다.

    하지만 인생 후반기를 연구의 시기로 바라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50년, 60년을 살아온 사람에게는 이미 엄청난 자료가 축적되어 있다. 가족관계, 직업, 실패, 성공, 인간관계, 돈, 자녀교육, 건강, 지역사회….

    문제는 경험이 없는 것이 아니다.

    경험을 연구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한 사람의 시행착오가 정리되면 후배에게는 지도가 된다.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경험을 연구하여 사회에 돌려준다면 대한민국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생활 연구소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고령사회는 반드시 사회적 부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수십 년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연구자로 전환되는 순간, 고령사회는 인류가 한 번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던 거대한 지혜의 사회가 될 가능성도 있다.

    이것이 우리가 ‘노인을 어떻게 돌볼 것인가’와 함께 ‘어떻게 어른을 만들어낼 것인가’를 질문해야 하는 이유다.

    결론|어른의 부재는 새로운 어른이 등장할 자리다

    우리는 흔히 사회에 어른이 없다고 한탄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낼 필요는 없다.

    어른이 없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말하면 새로운 어른의 기준을 만들 때가 되었다는 신호일 수도 있다.

    이제 어른은 나이로 인정받는 사람이 아니라 삶으로 증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많이 배웠기 때문에 어른인 것도 아니고, 높은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어른인 것도 아니다.

    자신이 배운 지식과 살아온 경험을 끊임없이 연구하여 사회가 필요로 하는 지혜로 바꾸고, 그것을 다음 세대에게 조건 없이 나눌 수 있을 때 비로소 한 사람의 나이는 사회적 가치가 된다.

    그래서 고령사회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어쩌면 이것인지도 모른다.

    “노인이 얼마나 늘어날 것인가?”가 아니라
    “우리 사회는 얼마나 많은 어른을 만들어낼 것인가?”

    그리고 그 질문은 아직 나이 든 사람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오늘의 청년도 언젠가는 기성세대가 된다.

    그러므로 어른이 되는 공부는 노년에 시작하는 공부가 아니다. 자신의 경험을 관찰하고, 실패에서 배우고, 사회의 문제를 남의 탓으로만 돌리지 않으며, 내가 알아낸 것을 다음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지혜로 바꾸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나이는 저절로 들지만, 어른은 저절로 되지 않는다.

    어쩌면 대한민국이 다음 단계의 지식사회로 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지식이 아니라, 이미 가진 지식을 사람과 사회를 위해 사용할 줄 아는 ‘연구하는 어른’의 탄생일 것이다.

  • 고집이 강한 사람을 어디까지 이해해야 할까?

    고집은 성격이 아니라, 아직 업데이트되지 않은 지식일 수 있다

    우리는 고집이 강한 사람을 만나면 성격부터 평가한다.

    “원래 저 사람은 고집이 세.”
    “자기 말밖에 몰라.”
    “나이가 들수록 더 심해졌어.”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누구에게나 고집은 있다. 평소에는 합리적이고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는 사람도 어떤 문제에서는 좀처럼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

    그렇다면 고집은 정말 타고난 성격의 문제일까?

    다른 관점에서 보면 고집은 그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축적한 지식과 경험을 쉽게 버리지 않는 현상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질문도 달라진다.

    고집을 어떻게 꺾을 것인가가 아니라, 사람은 언제 자신이 옳다고 믿었던 것을 스스로 내려놓는가.

    여기에 고집을 바라보는 새로운 출발점이 있다.

    1. 고집이 강하다는 것은 자기 안에 이미 답이 있다는 뜻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의외로 고집을 부리기 어렵다.

    “잘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문제가 복잡해지는 것은 어느 정도 알고 있을 때다.

    자신이 살아온 경험이 있고, 성공했던 방식이 있고, 오랫동안 믿어온 상식이 있다. 그것들이 쌓이면 사람 안에는 하나의 ‘답’이 만들어진다.

    “내가 살아봐서 알아.”
    “예전부터 이렇게 해왔어.”
    “그건 해봐야 안 돼.”

    이 말들이 모두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실제로 경험에서 얻은 지식에는 상당한 힘이 있다.

    하지만 바로 그 힘 때문에 역설이 생긴다.

    지식은 사람을 성장시키지만, 오래된 지식은 때로 새로운 지식을 막는다.

    어제까지 나를 지켜준 답이 오늘의 나를 가두는 답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고집의 반대말은 ‘순종’이 아닐지도 모른다.

    고집의 반대편에는 오히려 업데이트가 있다.

    새로운 정보를 만나고, 기존의 경험과 비교하고, 더 나은 것이 확인되면 자신의 답을 수정하는 능력이다.

    많이 아는 것보다 자신의 앎을 수정할 수 있는 사람이 더 유연한 지식인인 이유다.

    2. 고집은 틀린 답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답이 없는 상태’일 수 있다

    사람에게 어떤 생각을 버리라고 말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생각을 버린 자리에는 무엇인가가 들어와야 한다.

    오랫동안 장사를 해온 사람에게 “요즘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30년 동안 자녀를 키운 부모에게 “그런 방식의 교육은 이제 맞지 않습니다”라고 말해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에게는 자신의 경험이라는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건 틀렸습니다”라는 말만으로는 사람이 움직이지 않는다.

    기존의 답보다 더 나은 답이 보여야 한다.

    여기에서 고집에 대한 또 하나의 역설이 나온다.

    고집이 센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더 강한 설득이 아니라 더 좋은 대안일 수 있다.

    기존의 방법보다 새로운 방법이 실제로 더 합리적이고, 더 효율적이며, 현재의 환경에 더 잘 맞는다는 것을 이해하면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움직이기도 한다.

    그 순간 변화는 패배가 아니다.

    자신이 가진 지식에 새로운 지식을 더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은 “내 말을 들어”가 아니라,

    “당신이 가진 답보다 이것이 왜 더 나은지 함께 보자”

    에 가까울 수 있다.

    3. 지식사회에서 더 위험한 것은 무지가 아니라 ‘완성된 생각’이다

    오늘날 우리는 과거 어느 시대보다 많은 정보를 접한다.

    검색하면 지식이 나오고, 영상으로 전문가의 설명을 듣고, 인공지능에게 질문하면 몇 초 만에 수많은 자료를 정리할 수 있다.

    이런 사회에서는 지식이 없는 것보다 다른 문제가 더 중요해진다.

    자신이 이미 충분히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모른다고 생각하면 찾는다.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배운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이 완성되었다고 판단하는 순간 더 이상 새로운 정보가 들어올 자리가 없다.

    그래서 지식이 많다고 반드시 고집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지식이 많아지면서 더 정교한 고집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이것은 개인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기업에서도, 사회에서도 일어난다.

    과거에 성공했던 방식이 새로운 시도를 막고, 오랫동안 유지된 제도가 변화된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며, 전문가의 경험이 새로운 세대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이 생긴다.

    그래서 변화가 빠른 시대에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만큼 중요한 능력이 하나 더 필요하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지금도 유효한가를 점검하는 능력이다.

    고집이 사라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고집의 수준이 높아져야 한다

    그렇다면 고집은 모두 버려야 할까?

    그것도 이상하다.

    자신의 원칙을 쉽게 버리지 않는 사람, 오랫동안 연구를 이어가는 사람, 수많은 실패에도 자신의 길을 계속 가는 사람에게도 강한 고집이 있다.

    어떤 고집은 사회를 불편하게 하지만 어떤 고집은 세상을 바꾼다.

    차이는 무엇일까?

    낮은 고집은 ‘내가 옳다’에서 멈추고, 높은 고집은 ‘무엇이 옳은가’를 끝까지 찾는다.

    이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방향이 완전히 다르다.

    전자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지식을 사용하고, 후자는 더 나은 답을 찾기 위해 자신의 지식까지 의심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집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자신의 생각을 함부로 버리지 않되 더 좋은 답을 만나면 기꺼이 수정할 수 있는 사람.

    원칙은 단단하지만 생각은 열려 있는 사람.

    그것이 지식이 넘쳐나는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고집이다.

    결국 사람의 성장을 막는 것은 고집 자체가 아니다.

    ‘나는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다.

    어쩌면 평생 공부한다는 것은 새로운 지식을 계속 쌓는 일이 아니라,

    어제까지 정답이라고 믿었던 것을 오늘 다시 질문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일인지도 모른다.

  • 마음·생각·감정은 왜 자꾸 엇갈릴까

    내면의 세 움직임을 구별하는 법

    우리는 하루에도 여러 번 이런 말을 한다.

    “내 마음이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아.”

    마음, 생각, 감정.

    너무 익숙한 말들이어서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막상 “셋은 어떻게 다른가?”라고 물으면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어쩌면 우리가 자신의 내면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마음이 복잡해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것을 하나의 ‘마음’이라고 부르며 살아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조금 낯선 질문을 던져보자.

    마음과 생각과 감정이 서로 다른 일을 하고 있다면 어떨까?

    우리는 너무 빨리 ‘내 마음’을 결정한다

    새로운 일을 제안받았다고 해보자.

    처음에는 왠지 싫다.

    그래서 생각한다.

    “나는 이 일을 하고 싶지 않은가 봐.”

    반대로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났는데 느낌이 좋다.

    “이 사람은 나와 잘 맞을 것 같아.”

    우리는 이렇게 순간적으로 일어난 느낌이나 판단을 쉽게 ‘내 마음’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생각이 달라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싫었던 일이 오히려 나에게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하고, 첫인상이 좋았던 사람과 예상하지 못한 갈등을 겪기도 한다.

    무엇이 달라진 것일까?

    처음의 내가 틀렸던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아직 판단할 재료가 충분하지 않았던 것일 수 있다.

    사람을 한 번 만나고 그 사람 전체를 알 수 없듯, 하나의 정보가 들어왔다고 곧바로 충분한 생각이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생각이 익기도 전에 결론부터 만든다.

    그리고 그 결론에 이름을 붙인다.

    “이게 내 마음이야.”

    어쩌면 마음이 자주 바뀌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생각하지 않은 것을 너무 일찍 마음이라고 불러왔던 것은 아닐까.

    생각에도 익는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생각이 많으면 깊이 생각했다고 여기기 쉽다.

    하지만 생각의 양과 생각의 깊이는 다르다.

    하루 종일 같은 고민을 반복하는 것도 생각이고,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경험을 돌아보며 하나의 판단을 만들어가는 것도 생각이다.

    둘은 같은 ‘생각’이지만 결과는 전혀 다르다.

    음식에도 익는 시간이 필요하듯 생각에도 숙성의 시간이 필요하다.

    처음 들은 정보는 아직 재료에 가깝다.

    그것을 다른 경험과 비교하고, 내가 알고 있던 것과 연결하고, 때로는 반대 의견도 들어보면서 생각은 조금씩 달라진다.

    그래서 어제 확신했던 것이 오늘은 달라질 수 있다.

    이것을 줏대가 없다고만 볼 필요는 없다.

    생각이 자라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하나의 역설이 있다.

    우리는 빨리 결론을 내리는 사람을 판단력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때로는 결론을 조금 늦출 줄 아는 사람이 오히려 더 정확하게 판단한다.

    모르는 것을 모른 채 잠시 두는 능력, 더 알아볼 때까지 결론을 보류하는 능력도 생각의 힘이다.

    마음은 ‘하고 싶은 것’과 같은 것일까

    우리는 “마음 가는 대로 살아라”라는 말을 좋아한다.

    자기답게 살라는 의미에서는 좋은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마음이 가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은 언제나 같은 것일까?

    공부하기 싫다.
    운동하기 싫다.
    불편한 사람과 이야기하기 싫다.

    지금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은 분명 내 안에서 일어난 움직임이다.

    그러나 그것을 모두 ‘내 마음’이라고 한다면 이상한 일이 생긴다.

    오늘의 마음과 내일의 마음이 계속 싸운다.

    오늘은 쉬고 싶었는데 내일은 왜 하지 않았느냐며 후회한다.

    오늘은 화가 나서 관계를 끊고 싶었는데 며칠 뒤에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후회한다.

    그래서 마음을 조금 다르게 볼 필요가 있다.

    마음은 순간의 ‘하고 싶다, 하기 싫다’보다 더 긴 시간의 나를 바라보는 내면의 방향일 수 있다.

    지금은 하기 싫지만 나에게 필요한 일이 있고, 지금은 갖고 싶지만 갖지 않는 것이 더 좋은 것도 있다.

    이것을 구별하기 시작하면 ‘마음을 따른다’는 말의 의미도 달라진다.

    마음을 따른다는 것은 순간의 나에게 무조건 충실해지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생각한 뒤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일 수 있다.

    내면을 구별하면 선택이 달라진다

    마음·생각·감정을 굳이 구별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평소에는 없어도 살아가는 데 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중요한 선택 앞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직장을 그만둘 것인가.
    이 사람과 계속 관계를 이어갈 것인가.
    아이의 선택을 어디까지 믿어줄 것인가.
    새로운 일을 시작할 것인가.

    이런 순간에는 ‘지금 느끼는 것’과 ‘충분히 생각한 것’, 그리고 ‘내가 어떤 방향으로 살아갈 것인가’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는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지금 느끼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은 어디까지인가?
    아직 더 생각해봐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어떤 방향을 선택하고 싶은가?

    이 질문들은 비슷해 보이지만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본다.

    인간의 내면은 하나의 목소리로 움직이는 단순한 세계가 아닐지도 모른다.

    감정은 움직이고, 생각은 익어가며, 마음은 방향을 잡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마음을 무조건 믿는 법도, 생각을 멈추는 법도 아니다.

    내 안에서 지금 무엇이 움직이고 있는지를 구별하는 법이다.

    어쩌면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은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빨리 정의하는 데 있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쉽게 결론 내리지 않고 자신의 내면을 오래 관찰할 수 있는 힘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래서 마음·생각·감정을 구별하는 일은 단순한 말의 구별이 아니다.

    반응하고 결정하던 삶에서, 살펴보고 선택하는 삶으로 옮겨가는 연습이다.

  • AI는 감정을 흉내 낼 수 있지만, 인간은 감정으로 성장한다

    감정은 인간의 약점일까, 인간다움의 핵심일까?

    AI와 대화를 하다 보면 묘한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같은 질문을 여러 번 해도 짜증을 내지 않습니다. 무리한 부탁을 해도 기분 나빠하지 않고, 실수를 지적해도 자존심을 세우지 않습니다.

    반면 인간은 다릅니다.

    말 한마디에 기분이 상하고, 인정받으면 힘이 나며, 무시당했다고 느끼면 하루 종일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해볼 수 있습니다.

    감정은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일까?
    오히려 감정이 없다면 우리는 더 합리적이고 편안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조금 다르게 바라보면, 감정은 인간의 불완전함을 보여주는 결함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도록 돕는 중요한 신호일 수 있습니다.

    1. 감정은 마음속에서 울리는 알림이다

    휴대전화에는 수많은 알림이 뜹니다.

    배터리가 부족하면 충전하라고 알려주고, 저장 공간이 부족하면 정리가 필요하다고 알려줍니다.

    우리는 그 알림을 휴대전화의 고장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기를 제대로 관리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라고 생각합니다.

    감정도 비슷하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기쁨은 내가 무엇을 소중하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주고, 서운함은 내가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는지를 알려줍니다. 화는 내가 어떤 상황을 부당하다고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드러내고, 불안은 아직 준비되지 않았거나 예측하기 어려운 무엇인가를 마주하고 있다는 신호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신호보다 감정 자체를 문제로 생각합니다.

    “왜 나는 이렇게 화가 날까?”

    “왜 이렇게 서운하지?”

    “왜 마음이 불편하지?”

    하지만 질문을 조금 바꾸어 보면 어떨까요?

    “이 감정은 지금 나에게 무엇을 알려주고 있는가?”

    감정을 없애려는 것과 감정을 읽으려는 것은 전혀 다른 삶의 태도를 만들어냅니다.

    2. 감정 조절은 참는 능력이 아니라 이해하는 능력이다

    우리는 흔히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을 보고 “감정 조절을 잘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화를 내지 않았다고 해서 화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겉으로 웃고 있다고 해서 서운함까지 없어진 것도 아닙니다.

    참는 것은 행동을 멈추게 할 수는 있지만, 그 감정이 왜 생겼는지까지 해결해 주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성숙한 감정 조절에는 한 단계가 더 필요합니다.

    반응하기 전에 이해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말 때문에 화가 났다면 곧바로 “저 사람이 나를 화나게 했다”고 결론 내리기 전에 살펴볼 수 있습니다.

    나는 왜 그 말에 유독 민감했을까?

    내가 기대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상대의 실제 의도와 내가 받아들인 의미는 같았을까?

    이 질문이 시작되는 순간 감정은 싸움의 원인이 아니라 자기 이해의 자료가 됩니다.

    삶의 경험과 지식이 쌓이고 사람을 보는 시야가 넓어질수록 같은 사건을 해석하는 방식도 달라집니다.

    예전에는 모욕이라고 생각했던 말을 나중에는 충고로 이해하기도 하고, 실패라고 생각했던 일이 시간이 지나 새로운 방향을 찾게 한 계기였음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감정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감정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그릇이 달라진 것입니다.

    3.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과 AI가 달라진다

    AI도 감정에 관한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슬픔을 설명하고, 위로하는 문장을 만들고, 분노한 사람에게 어떤 말을 하면 좋은지도 제안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감정은 단순한 정보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슬픔, 처음 아이를 품었을 때의 벅참, 오랫동안 노력한 일이 인정받았을 때의 기쁨, 믿었던 사람에게 실망했을 때의 허탈함은 사전적 정의만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그것을 살아냅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이전과 조금 다른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AI 시대가 깊어질수록 역설적으로 인간에게 중요한 능력은 감정을 없애는 능력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다룰 수 있는 능력이 될지도 모릅니다.

    AI가 더 빠르게 계산하고 더 많은 정보를 처리하게 될수록 인간에게는 다른 질문이 남습니다.

    나는 왜 이것을 선택하는가?

    나는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나는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만들고 싶은가?

    나는 지금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가?

    이 질문에는 지식만으로 답하기 어렵습니다.

    생각과 경험, 관계와 감정이 함께 필요합니다.

    감정은 없애야 할 소음이 아니라 읽어야 할 신호다

    우리는 오랫동안 좋은 감정과 나쁜 감정을 구분해 왔습니다.

    기쁨과 감사는 좋은 감정이고, 화와 불안과 서운함은 가능하면 없애야 할 감정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불편한 감정에도 역할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의 나와 환경 사이에서 무엇인가 살펴볼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감정이 생기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생겼을 때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입니다.

    화를 상대를 공격하는 데 사용하면 관계가 무너질 수 있지만, 내가 무엇에 민감한지를 발견하는 데 사용하면 자기 이해가 깊어질 수 있습니다.

    서운함을 원망으로 키울 수도 있지만, 내가 상대에게 무엇을 기대했는지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같은 감정이지만 사용하는 방향에 따라 결과는 달라집니다.

    그래서 인간의 성장은 감정을 제거하는 과정이라기보다, 감정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는 과정인지도 모릅니다.

    AI가 인간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더 빠르게 답하는 시대가 오더라도, 인간에게는 여전히 인간만의 공부가 남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읽고, 관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경험을 통해 조금씩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공부입니다.

    오늘 마음을 흔든 감정이 하나 있었다면 무조건 밀어내기보다 한번 물어보면 어떨까요?

    “이 감정은 지금 나에게 무엇을 알려주고 있는가?”

    어쩌면 그 질문에서부터 감정은 문제가 아니라 성장의 재료가 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 마음을 비우려고 애쓸수록 왜 더 힘들어질까?

    마음을 억지로 바꾸기보다 나를 성장시키는 방법

    서론 | 우리는 왜 마음부터 바꾸려고 할까?

    살다 보면 마음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의 말에 화가 나고, 별일 아닌 것 같은데 서운함이 오래 남기도 합니다. 걱정하지 않으려고 할수록 걱정이 커지고, 잊으려고 할수록 오히려 그 일이 더 선명하게 떠오르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흔히 말합니다.

    “마음을 비워야지.”
    “좋게 생각해야지.”
    “마음을 다스려야 해.”

    그런데 여기에서 한번 거꾸로 질문해 보고 싶습니다.

    마음은 정말 내가 마음먹는다고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일까요?

    오히려 마음을 억지로 바꾸려고 애쓰는 일이 나를 더 힘들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본론 1 | 감정을 없애는 것과 감정을 이해하는 것은 다르다.

    불편한 감정이 생기면 우리는 그것을 빨리 없애려고 합니다.

    화를 내지 않으려고 하고, 서운하지 않은 척하기도 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속 감정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차이가 하나 생깁니다.

    감정을 억누르는 것과 감정을 이해하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왜 나는 이 말에 화가 났을까?”
    “왜 같은 일이 반복될 때마다 힘들어질까?”
    “상대의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혹시 내가 이해하지 못한 것은 없을까?”

    이렇게 질문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마음과 싸우는 대신 마음을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마음을 없애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더 배우고 이해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신호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본론 2 | 마음을 바꾸려 하지 말고 나를 성장시켜 본다면

    여기에서 조금 역설적인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마음을 먼저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성장하면 어떨까요?

    어릴 때는 이해할 수 없었던 부모님의 행동을 나이가 든 뒤 이해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견디기 어려웠던 말도 경험과 공부가 쌓이면 다르게 들릴 때가 있습니다.

    상황이 달라진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상대가 달라진 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그 상황을 바라보는 내가 달라진 것입니다.

    사람은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경험을 쌓으면서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됩니다. 한쪽에서만 바라보던 일을 다른 방향에서도 생각할 수 있게 되고, 상대의 입장도 조금씩 이해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마음공부란 마음속에 있는 무엇인가를 억지로 없애는 일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이해와 분별의 폭을 넓혀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본론 3 | 좋은 지식은 마음을 직접 고치지 않고 사람을 바꾼다.

    우리는 몸을 성장시키기 위해 음식을 먹습니다. 그렇다면 생각과 정신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요?

    저는 그중 하나가 좋은 지식과 배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단순히 많이 아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내가 왜 화가 나는지 이해하게 하는 지식,
    사람과 사람의 차이를 이해하게 하는 지식,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지식,
    나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지식입니다.

    이런 배움이 하나씩 쌓이면 같은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저 사람이 나를 힘들게 한다”고 생각했던 일을 어느 순간 “나는 이 관계에서 무엇을 배우고 있는가?”라고 다시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성장의 흥미로운 점입니다.

    성장은 세상을 내 뜻대로 바꾸는 힘이 아니라, 같은 세상을 이전과 다르게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힘일지도 모릅니다.

    결론 | 마음을 비우기 전에 나를 채워보자.

    마음이 힘들 때마다 마음부터 고치려고 했습니다.

    화를 없애려고 하고, 욕심을 버리려고 하고, 걱정을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질문을 조금 바꾸어 볼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을 어떻게 없앨까?”가 아니라
    “나는 여기에서 무엇을 더 배우고 성장해야 할까?”

    마음을 억지로 비우려고 하기보다 좋은 지식과 경험으로 나를 채우고, 사람과 세상을 이해하는 힘을 조금씩 키워가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억지로 버리지 않았는데도 예전의 화가 작아지고, 억지로 참지 않았는데도 상대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마음을 비우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어쩌면 나 자신을 바르게 채우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과정이 우리가 말하는 성장의 시작이 아닐까요?

  • 사람들과 편안하게 관계 맺는 방법

    인연은 주어질 수 있지만, 관계는 만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평생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태어나면서 부모와 자식이 되고, 형제자매를 만나며 가족이라는 첫 번째 관계망을 경험한다. 성장한 뒤에는 학교와 직장, 지역사회와 다양한 모임을 통해 전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이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빠르게 변했는데, 사람을 대하는 관계의 기준은 여전히 가족 중심의 오래된 방식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가족인데 이 정도는 이해해야지.”
    “부모니까 당연히 그래야지.”
    “자식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오래 알고 지낸 사이인데 그것도 못 해주나?”

    과거에는 이러한 관계 방식이 공동체를 유지하는 중요한 힘이었다. 그러나 개인의 생각과 역할이 다양해진 현대사회에서는 혈연이나 친분만으로 관계를 유지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관계를 끊는 기술이 아니라 관계의 방식을 바꾸는 공부인지 모른다.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사회라는 광장으로

    과거 한국사회에서 가족은 삶의 가장 강력한 안전망이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생겨도 가족이 도왔고, 아이를 키우거나 부모를 모시는 일도 가족 안에서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개인보다 가족과 집단을 우선하는 문화가 오랫동안 유지된 데에는 그 시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다르다.

    우리는 하루의 많은 시간을 가족이 아닌 사람들과 보낸다. 직장 동료, 고객, 친구, 이웃, 온라인에서 만나는 사람까지 관계의 범위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어졌다.

    따라서 현대인에게 필요한 관계 능력도 달라져야 한다.

    가족이니까 참는 관계에서
    서로를 존중하기 때문에 함께하는 관계로,

    나이가 많으니까 따르는 관계에서
    역할과 책임을 인정하는 관계로,

    오래 알았으니까 유지하는 관계에서
    서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에 이어가는 관계로

    조금씩 이동할 필요가 있다.

    가족의 중요성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가족 안에서도 부모, 자녀, 배우자를 ‘내 사람’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독립된 사회인으로 존중하는 새로운 관계가 필요해졌다는 뜻이다.

    불편함은 관계를 끊으라는 명령이 아니라 살펴보라는 시그널이다

    새로운 사람이나 모임을 만났을 때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한 경우가 있다.

    반대로 특별한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운데도 계속 마음이 불편하고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경우도 있다.

    우리는 이런 느낌을 너무 쉽게 무시하기도 하고, 반대로 한 번의 느낌만으로 상대를 단정하기도 한다.

    둘 다 조심할 필요가 있다.

    불편함이 생겼다면 곧바로 “저 사람은 나와 맞지 않는다”고 결론 내리기보다 한 번 더 살펴볼 수 있다.

    왜 나는 불편했을까?

    상대의 문제인가?
    나의 선입견 때문인가?
    서로의 가치관이 다른 것인가?
    아니면 내가 지금까지 익숙했던 관계 방식과 다르기 때문인가?

    이 질문이 중요하다.

    관계에서 일어나는 편안함과 불편함은 정답이라기보다 우리에게 관찰을 요구하는 시그널이라고 볼 수 있다.

    한 번은 경험하고,
    두 번째는 관찰하고,
    반복된다면 그때는 자신의 판단을 점검해보는 것이다.

    자연도 갑자기 계절을 바꾸지 않는다. 작은 변화들이 쌓이고 어느 순간 계절이 달라진다.

    사람의 관계도 어쩌면 비슷하다.

    반복해서 나타나는 신호를 무시하지 않되, 한 번의 감정으로 사람을 재단하지 않는 것.

    그 사이에 ‘관계의 지혜’가 있다.

    좋은 관계는 말을 잘하는 것보다 잘 듣는 데서 시작된다

    현대사회는 자신을 표현해야 하는 시대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보여주려고 한다.

    그런데 인간관계에서는 역설적인 현상이 일어난다.

    나를 많이 보여줄수록 좋은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자기 이야기를 잘하는 사람보다 자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는 사람에게 마음을 여는 경우가 많다.

    경청은 단순히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상대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관찰하고, 그 사람의 생각을 충분히 들은 뒤 필요한 순간에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능력이다.

    특히 가족관계에서는 이것이 더욱 어렵다.

    오랫동안 함께 살아왔다는 이유로 우리는 상대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이미 알고 있다고 착각하기 쉽다.

    부모는 자녀를 안다고 생각하고,
    배우자는 상대를 안다고 생각하며,
    자녀 역시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은 계속 변한다.

    어제의 자녀와 오늘의 자녀가 같지 않고, 10년 전의 배우자와 오늘의 배우자도 같지 않다.

    그래서 오래된 관계일수록 오히려 다시 들어야 한다.

    관계의 새로운 패러다임

    대한민국은 짧은 기간 동안 산업사회와 정보사회를 지나 지식사회로 이동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은 교육을 받고, 정보를 찾고,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며 살아간다.

    그런 사회에서는 관계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다.

    누군가가 나를 책임져주기를 기다리는 관계보다 각자가 자기 역할을 하면서 서로 돕는 관계가 필요하다.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희생을 요구해서도 안 되고, 사회적 관계라는 이유로 필요할 때만 사람을 이용해서도 안 된다.

    가족에게는 사회적 존중이 필요하고,
    사회에서는 가족에게 베풀었던 따뜻함이 필요하다.

    어쩌면 우리가 만들어야 할 새로운 관계는 바로 그 중간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삶에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편안함과 불편함, 만남과 헤어짐, 가까워짐과 멀어짐도 무조건 좋은 일과 나쁜 일로 나누기보다 이렇게 질문해볼 수 있다.

    “이 관계는 지금 나에게 무엇을 배우라고 하는가?”

    관계는 사람을 붙잡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가족이든 친구든 직장 동료든 마찬가지다.

    인연은 우리 앞에 주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 인연과 어떤 관계를 만들어갈 것인지는 결국 우리의 몫이다.

    이제 관계의 기준도 달라져야 한다.

    누구와 얼마나 오래 알고 지냈는가보다, 서로를 어떻게 이해하고 존중하며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는가.

    인연은 주어질 수 있지만, 관계는 저절로 완성되지 않는다.
    관계는 서로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인간관계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 추석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변하고 있다

    의무로 모이던 명절에서 서로의 삶을 이해하는 시간으로

    추석이 다가옵니다.

    예전에는 ‘추석’이라는 말만 들어도 고향집 풍경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이고, 음식을 장만하고, 조상을 기리고, 멀리 떨어져 살던 형제자매가 서로의 안부를 묻는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즘 추석의 풍경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고향 대신 여행지로 향하고, 누군가는 명절 전후로 부모님을 찾아뵙습니다. 제사를 간소화하거나 아예 지내지 않는 가정도 늘고 있습니다. 자녀들은 결혼하면서 양가를 모두 생각해야 하고, 명절에도 일을 해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며 우리는 종종 말합니다.

    “요즘은 명절이 예전 같지 않아.”

    그런데 정말 추석의 의미가 사라지고 있는 것일까요?

    어쩌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맞는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인지도 모릅니다.

    시대가 변하면 명절도 변한다

    과거의 추석은 농경사회의 생활환경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한 해 농사를 마무리하며 수확에 감사하고, 마을과 가족이 함께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지금처럼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는 명절이 흩어진 가족과 친척을 만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생활은 크게 달라졌습니다.

    도시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많아졌고 가족의 규모는 작아졌습니다. 여성의 사회활동이 늘었고 부모와 자녀가 서로 다른 지역에서 살아가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습니다.

    평소에도 전화와 영상통화로 얼굴을 볼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주말에도 부모님을 찾아뵐 수 있습니다.

    생활환경은 이렇게 달라졌는데 명절을 보내는 방법만 과거와 똑같아야 한다면, 그 안에서 갈등이 생기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몇 시간씩 교통체증을 견디며 반드시 명절 당일에 이동해야 하는지, 많은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 여전히 정성의 기준이어야 하는지, 가족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명절을 보내야 하는지도 이제는 조금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통을 버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전통에서 무엇을 이어가고, 무엇을 시대에 맞게 바꿀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가족은 그대로지만 사랑하는 방식은 달라지고 있다

    가족의 모습도 달라졌습니다.

    자녀가 결혼하면 새로운 가족관계가 만들어집니다. 내 아들의 배우자는 누군가의 소중한 딸이고, 내 딸의 배우자 역시 다른 가정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명절만 되면 여전히 어느 집에 먼저 가야 하는지, 얼마나 오래 머물러야 하는지, 누가 음식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두고 마음이 불편해지는 가정이 적지 않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 사이에서도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요즘 돈은 얼마나 버니?”
    “결혼은 언제 할 거니?”
    “아이 성적은 어떠니?”
    “누구네 자식은 잘됐다더라.”

    가족이니까 편하게 묻는 말이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비교와 평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추석에는 질문부터 조금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요?

    “올해는 어떻게 지냈니?”
    “힘든 일은 없었니?”
    “요즘 가장 재미있는 일이 뭐니?”

    자랑하고 평가하는 시간이 아니라 서로가 살아온 한 해를 들어주는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 달라지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많은 음식을 준비해야만 정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래 함께 있어야만 가까운 가족인 것도 아닙니다.

    한 끼를 먹더라도 편안하게 이야기하고, 짧게 만나더라도 서로에게 고마움을 전할 수 있다면 그것도 충분히 좋은 명절입니다.

    가족의 울타리를 조금 넓혀보는 추석

    추석의 의미를 가족 안에서만 찾을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풍요로운 명절을 보내는 동안 누군가는 혼자 추석을 맞습니다. 가족과 멀리 떨어져 생활하는 사람도 있고, 명절에도 자신의 자리에서 일해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의 추석은 ‘우리 가족이 잘 지내는 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주변을 한 번 돌아보는 날이 되어도 좋겠습니다.

    거창한 일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랫동안 연락하지 못했던 사람에게 안부를 묻고, 혼자 지내는 이웃을 한 번 살펴보고, 지역의 작은 가게나 시장을 이용하고, 아이들과 함께 작은 나눔을 실천하는 것에서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명절의 따뜻함이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 이웃과 사회로 조금씩 퍼져나간다면 추석은 오히려 과거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진 날이 될 수도 있습니다.

    과거에는 한 마을이 함께 수확을 나누었다면, 오늘날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하나의 더 큰 공동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추석의 풍속은 우리가 만든다

    전통은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는 이유만으로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좋은 뜻을 다음 세대가 이어갈 때 살아 있는 문화가 됩니다.

    조상을 기억하는 마음도 소중합니다.
    부모에게 감사하는 마음도 소중합니다.
    가족이 함께하는 시간도 소중합니다.

    그 소중한 마음을 지키기 위해 오히려 형식은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

    명절 당일이 아니라 서로 편한 날 부모님을 찾아뵐 수도 있고, 음식을 간소하게 준비해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을 늘릴 수도 있습니다. 제사를 지내는 가정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정성을 다하고, 다른 방식을 선택한 가족 역시 서로의 선택을 존중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전처럼 했느냐’가 아니라 그 시간을 통해 가족의 관계가 더 좋아졌느냐일 것입니다.

    이번 추석에는 한 가지 질문을 가족과 나누어보면 어떨까요?

    “우리 가족에게 추석은 어떤 날이면 좋을까?”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의 대답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른 생각을 들어보는 것부터 새로운 명절 문화는 시작될 것입니다.

    추석은 어느 한 세대의 것이 아니라 앞으로 살아갈 세대에게도 물려줄 우리의 문화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추석의 위기는 명절이 사라지는 데 있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시대는 달라졌는데 우리가 명절의 의미를 새롭게 만들어내지 못하는 데 있을지도 모릅니다.